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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동성애 홍보에 초점 맞춘 언론들
    지난 16일 서울시청 광장에서는 동성애와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서울문화퀴어축제’(동성애 행사와 홍보)가 열렸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 서울시의회를 중심으로 ‘동성애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가 열렸다. 외견상으로 보기에도 반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10배는 많아 보였다. 그만큼 국민들은 동성애와 이로 인한 소위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행사가 열리기 전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울시의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가 퀴어문화축제 서울광장 사용 허용에 대하여 63.4%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또 공공장소에서 과도한 노출,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것에 대하여 71.4%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사에 자녀들과 함께 가족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는 참여할 수 없다라는 대답이 무려 78.9%를 차지하였다. 국민들이 정말 싫어하는 동성애 행사를 서울시가 허용한 셈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축제는 열렸고, 언론 보도에 의하면 1만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를 반대하는 국민대회는 그 10배 가까이 참가했지만, 언론들은 엇비슷한 숫자라고 보도하거나 아예 숫자를 보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동성애 반대 열기를 외면한 잘못된 처사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이 언제부터 이처럼 한심한 편집증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정황들은 사진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언론들은 이미 동성애 축제에 초첨을 맞추고, 이에 반대하는 많은 국민들의 목소리는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는 편향된 보도를 통해서 여론을 왜곡하며 ‘국민의 알 권리’를 공공연히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 행사나 이를 반대하는 집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각, 옆의 장소에서 벌어졌는데도, 한쪽은 과장하거나 한쪽은 축소시키고 아예 없었던 일처럼 대하고 있는 태도는 비난과 지탄을 받기에 합당하다. 공영방송이나 공중파 방송이나 중앙 언론이나 정말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고, 꼭 알아야 할 국민적 외침의 중요한 현장을 배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언론의 수용자이며 전파의 주인인 국민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국민적 목소리가 엄연히 있음에도 이를 차별하거나 일부러 보도를 회피하는 것은 한쪽 눈을 감은 것과 같다. 어찌 한쪽 눈만으로 세상의 넓은 풍경을 담아낼 수 있을까? 언론은 두 눈 크게 뜨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소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양심의 목소리와 인간의 참된 삶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의 절절한 외침을 간과(看過)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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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평
    2022-07-22
  • 논 평 / MB정부로 회귀한 윤석열정부의 부자·대기업 감세
    21일 2022년 세제개편안이 발표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부자/대기업에 파격적인 감세혜택을 주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불평등이 심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재정여력 확보가 절실한 시점에서 거꾸로 대규모 감세를 추진한 것으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인하하여, MB정부의 세율로 회귀하였다. 명목세율이 OECD 평균에 비해 높다는 것을 감세의 이유로 내세웠으나, 중요한 것은 명목세율이 아니라 각종 공제감면이 반영된 실효세율이다. 법인세 과세표준 5,000억원을 초과하는 기업의 실효세율이 그 아래 구간의 기업의 실효세율 보다 낮은 실효세율 역전현상은 2021년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나마 과세표준 3,000억원 구간의 최고세율을 인상했기 때문에 과거보다 실효세율 역전의 정도가 완화되었는데, 그 효과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과세표준 구간이 많은 것이 문제라면 22% 세율구간을 25%로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합부동산세에서도 대규모 감세방안이 발표되었다.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율을 폐지하여 최고세율을 6.0%에서 2.7%로 절반 이하로 대폭 인하하였다. 세부담 상한 축소, 주택에 대한 기본공제금액 상향, 1세대 1주택 특별공제 도입 등 고액 자산가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부동산 가격 하향 안정화를 위해서는 기왕에 강화해 둔 종합부동산세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부자 감세를 통해 부동산 가격 안정화의 가능성도 줄여버렸다. 금융투자소득 전면과세가 2년 유예된 것도 문제이다. 자산소득에 대한 적정한 과세는 공평과세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과도한 기본공제가 적용되긴 했으나, 주식양도차익을 포함하여 금융투자소득에 대해 전면과세를 하기로 한 것은 의미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금융투자소득 전면과세를 2년 유예했을 뿐만아니라 주식양도차익의 과세대상을 종목당 1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대폭 상향하여 고액 자산가의 세금을 크게 줄여주었다. 상속세와 증여세에도 감세가 추진되었다. 가업상속공제의 적용대상과 공제한도를 상향 조정하고, 사후관리 기간이 단축되었으며, 사후관리 요건도 완화되었다. 그밖에도 주택임대소득의 고가주택 기준이 상향조정되고 가상자산 과세가 2년 유예되는 등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를 줄여줄 수 있는 온갖 방안이 동원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막대한 감세규모와 그 혜택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에 대해서 꼼수를 동원하여 그 실상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는 점이다. 누가봐도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금융투자소득세, 상속/증여세 등에서 상당한 감세를 추진했는데, 기획재정부는 5년간 감세규모가 13.1조원 수준이고, 그 중에서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귀속되는 감세액은 5.3조원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기획재정부의 5년간 감세규모는 전년대비 기준으로 계산되었다. 하지만, 과거에 큰 규모의 증세나 감세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전년대비로 계산한 순액법 뿐만아니라 기준년도와 비교한 누적법 수치를 같이 비교 표시하여 일반 국민들이 그 효과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기준년도에 100조원의 세수가 있었는데 감세안을 통해 1년차에 95조원, 2년차부터 5년차까지 90조원의 세수가 예상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감세의 5년 효과를 10조원(1차년도 전년대비 5조원 감소, 2차년도에 1차년도 대비 5조원 감소, 3차년도 이후는 전년과 동일하므로 감소액 없음)으로 표시하는 것과 45조원(1차년도에 5조원 감소, 2차년도부터 4년간 10조원씩 40조원 감소)으로 표시하는 것 중에서 어느 방법이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는가? 당연히 기준년도와 비교하여 누적법으로 계산한 45조원이다. 누적법으로 계산하면 2022년 세제개편안을 감세효과는 60조원을 넘는다. 윤석열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기획재정부가 찾아낸 초과세수 53조원을 넘어서는 금액이다. 감세규모를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제시하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그 실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세부담 귀착효과도 과거와 다른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2021년 이전 세부담 귀착효과는 서민·중산층/고소득자, 중소기업/대기업으로 구분하여 분석되었다. 그리고 서민·중산층은 OECD 기준을 적용하여 중위소득 150% 이하로 계산되었다. 반면, 2022년 계산시에는 서민·중산층을 중위소득 200% 이하로 구분하여 과거보다 그 범위를 확대했다. 고소득자에 귀속되는 감세효과를 줄이기 위한 꼼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법인세에서도 중견기업을 따로 떼내어 중소기업에 포함시켰다. 과거의 분류대로 할 경우, 중소기업에 귀착되는 감세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분류를 변경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기에는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 요구된다. 적자를 보는 기업이나 가계는 법인세나 소득세를 아무리 깎아줘봐야 아무런 혜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업이나 가계가 이 위기를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재정지출을 확대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세제개편안은 변동 국면에서 각종 이득을 보고 세부담 여력이 있는 대기업, 고소득자, 고액자산가에 집중되었다. MB정부 때 작동하지 않았던 낙수효과만을 기대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이다. 윤석열 정부는 세부담 여력이 있는 계층에 대한 증세를 통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번 감세안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 하여야 한다. 2022년 7월 22일 내가만드는복지국가
    • 오피니언
    • 논평
    202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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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회 논평] 동성애 홍보에 초점 맞춘 언론들
    지난 16일 서울시청 광장에서는 동성애와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서울문화퀴어축제’(동성애 행사와 홍보)가 열렸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 서울시의회를 중심으로 ‘동성애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가 열렸다. 외견상으로 보기에도 반대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10배는 많아 보였다. 그만큼 국민들은 동성애와 이로 인한 소위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행사가 열리기 전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울시의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가 퀴어문화축제 서울광장 사용 허용에 대하여 63.4%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또 공공장소에서 과도한 노출,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것에 대하여 71.4%가 적절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사에 자녀들과 함께 가족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는 참여할 수 없다라는 대답이 무려 78.9%를 차지하였다. 국민들이 정말 싫어하는 동성애 행사를 서울시가 허용한 셈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축제는 열렸고, 언론 보도에 의하면 1만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를 반대하는 국민대회는 그 10배 가까이 참가했지만, 언론들은 엇비슷한 숫자라고 보도하거나 아예 숫자를 보도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동성애 반대 열기를 외면한 잘못된 처사이다. 우리나라 언론들이 언제부터 이처럼 한심한 편집증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정황들은 사진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언론들은 이미 동성애 축제에 초첨을 맞추고, 이에 반대하는 많은 국민들의 목소리는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는 편향된 보도를 통해서 여론을 왜곡하며 ‘국민의 알 권리’를 공공연히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 행사나 이를 반대하는 집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각, 옆의 장소에서 벌어졌는데도, 한쪽은 과장하거나 한쪽은 축소시키고 아예 없었던 일처럼 대하고 있는 태도는 비난과 지탄을 받기에 합당하다. 공영방송이나 공중파 방송이나 중앙 언론이나 정말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고, 꼭 알아야 할 국민적 외침의 중요한 현장을 배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언론의 수용자이며 전파의 주인인 국민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국민적 목소리가 엄연히 있음에도 이를 차별하거나 일부러 보도를 회피하는 것은 한쪽 눈을 감은 것과 같다. 어찌 한쪽 눈만으로 세상의 넓은 풍경을 담아낼 수 있을까? 언론은 두 눈 크게 뜨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소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양심의 목소리와 인간의 참된 삶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종교의 절절한 외침을 간과(看過)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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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2
  • 논 평 / MB정부로 회귀한 윤석열정부의 부자·대기업 감세
    21일 2022년 세제개편안이 발표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부자/대기업에 파격적인 감세혜택을 주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불평등이 심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재정여력 확보가 절실한 시점에서 거꾸로 대규모 감세를 추진한 것으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인하하여, MB정부의 세율로 회귀하였다. 명목세율이 OECD 평균에 비해 높다는 것을 감세의 이유로 내세웠으나, 중요한 것은 명목세율이 아니라 각종 공제감면이 반영된 실효세율이다. 법인세 과세표준 5,000억원을 초과하는 기업의 실효세율이 그 아래 구간의 기업의 실효세율 보다 낮은 실효세율 역전현상은 2021년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나마 과세표준 3,000억원 구간의 최고세율을 인상했기 때문에 과거보다 실효세율 역전의 정도가 완화되었는데, 그 효과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과세표준 구간이 많은 것이 문제라면 22% 세율구간을 25%로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합부동산세에서도 대규모 감세방안이 발표되었다.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율을 폐지하여 최고세율을 6.0%에서 2.7%로 절반 이하로 대폭 인하하였다. 세부담 상한 축소, 주택에 대한 기본공제금액 상향, 1세대 1주택 특별공제 도입 등 고액 자산가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부동산 가격 하향 안정화를 위해서는 기왕에 강화해 둔 종합부동산세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부자 감세를 통해 부동산 가격 안정화의 가능성도 줄여버렸다. 금융투자소득 전면과세가 2년 유예된 것도 문제이다. 자산소득에 대한 적정한 과세는 공평과세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과도한 기본공제가 적용되긴 했으나, 주식양도차익을 포함하여 금융투자소득에 대해 전면과세를 하기로 한 것은 의미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금융투자소득 전면과세를 2년 유예했을 뿐만아니라 주식양도차익의 과세대상을 종목당 1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대폭 상향하여 고액 자산가의 세금을 크게 줄여주었다. 상속세와 증여세에도 감세가 추진되었다. 가업상속공제의 적용대상과 공제한도를 상향 조정하고, 사후관리 기간이 단축되었으며, 사후관리 요건도 완화되었다. 그밖에도 주택임대소득의 고가주택 기준이 상향조정되고 가상자산 과세가 2년 유예되는 등 자산소득에 대한 과세를 줄여줄 수 있는 온갖 방안이 동원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막대한 감세규모와 그 혜택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에 대해서 꼼수를 동원하여 그 실상이 잘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는 점이다. 누가봐도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금융투자소득세, 상속/증여세 등에서 상당한 감세를 추진했는데, 기획재정부는 5년간 감세규모가 13.1조원 수준이고, 그 중에서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귀속되는 감세액은 5.3조원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기획재정부의 5년간 감세규모는 전년대비 기준으로 계산되었다. 하지만, 과거에 큰 규모의 증세나 감세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전년대비로 계산한 순액법 뿐만아니라 기준년도와 비교한 누적법 수치를 같이 비교 표시하여 일반 국민들이 그 효과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기준년도에 100조원의 세수가 있었는데 감세안을 통해 1년차에 95조원, 2년차부터 5년차까지 90조원의 세수가 예상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감세의 5년 효과를 10조원(1차년도 전년대비 5조원 감소, 2차년도에 1차년도 대비 5조원 감소, 3차년도 이후는 전년과 동일하므로 감소액 없음)으로 표시하는 것과 45조원(1차년도에 5조원 감소, 2차년도부터 4년간 10조원씩 40조원 감소)으로 표시하는 것 중에서 어느 방법이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는가? 당연히 기준년도와 비교하여 누적법으로 계산한 45조원이다. 누적법으로 계산하면 2022년 세제개편안을 감세효과는 60조원을 넘는다. 윤석열 정부가 취임하자마자 기획재정부가 찾아낸 초과세수 53조원을 넘어서는 금액이다. 감세규모를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제시하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그 실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세부담 귀착효과도 과거와 다른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2021년 이전 세부담 귀착효과는 서민·중산층/고소득자, 중소기업/대기업으로 구분하여 분석되었다. 그리고 서민·중산층은 OECD 기준을 적용하여 중위소득 150% 이하로 계산되었다. 반면, 2022년 계산시에는 서민·중산층을 중위소득 200% 이하로 구분하여 과거보다 그 범위를 확대했다. 고소득자에 귀속되는 감세효과를 줄이기 위한 꼼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법인세에서도 중견기업을 따로 떼내어 중소기업에 포함시켰다. 과거의 분류대로 할 경우, 중소기업에 귀착되는 감세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분류를 변경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기에는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 요구된다. 적자를 보는 기업이나 가계는 법인세나 소득세를 아무리 깎아줘봐야 아무런 혜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업이나 가계가 이 위기를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재정지출을 확대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세제개편안은 변동 국면에서 각종 이득을 보고 세부담 여력이 있는 대기업, 고소득자, 고액자산가에 집중되었다. MB정부 때 작동하지 않았던 낙수효과만을 기대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이다. 윤석열 정부는 세부담 여력이 있는 계층에 대한 증세를 통해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번 감세안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 하여야 한다. 2022년 7월 22일 내가만드는복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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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2
  • 절박한 믿음만 있다면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루카 5,17-26)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나 뜻도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로 판단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주님의 뜻이고, 저렇게 하는 것도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워하고 갈등하면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것도 주님의 뜻이요, 저 것도 주님의 마음임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훨씬 마음 편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다르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것을 받아 드리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처럼 이런저런 판단만 하지 않는다면 주님 말씀 따라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박하게 믿느냐?' 주님의 물음입니다.
    • 오피니언
    • 새누리묵상
    2022-04-26
  • “(그) 하늘과 (그) 땅을.....!” (창1:1b)
    성경은 무엇보다도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함과 오묘함을 장엄하게 울리고 있다. 이 창조야말로 기독교만의 위대한 선물이요, 재산이요, 능력이요, 소망이다. 이 말은 기독교의 모든 것은 창조로부터 시작을 해서, 창조의 본래의 맛과 멋을 드러내며, 결국은 이 창조의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완성된 하나님 나라(“Not yet”)로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계속해서 강조해 왔지만, 다시 한 번 말하자면 하나님의 창조, 곧 기독교의 유일한 창조의 사실을 그대로 통째로 이해하고 수용하여 모든 것의 출발점을 “신비, 위대함, 능력, 소망, 좋음” 등에 두고, 부요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위대함’을 비롯한 ‘좋음, 긍정’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고, 온갖 ‘좋지 않음과 부정’의 잔재들만을 풍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에 의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를 펼치든지 간에 ‘좋음과 긍정’의 말을 하기보다는 ‘징벌, 파괴, 고통’ 등의 채찍을 들고서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선포할 때에는 그 좋은 말들(“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복 받습니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으면서도, 어렵게, 정말 어렵게 들어온 “천하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서 마구, 마구 징벌의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왔으니 정말 잘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칭찬만 해줘도 부족할 텐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혹자들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어렵게 들어온 사람들일지라도, 이제 기독교의 그 혹독한 채찍(율법준수)을 내려쳐야만 제대로 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대로 날라 가버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들도 다하지 못하는 무거운 이상한 십자가(율법의 저주)를 지우고 있다. 물론 필자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무시하거나, 폐기시키거나, 등한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복음의 은혜로 충만한 하나님나라의 부요함을 맛보게 하면, 성령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더욱 성숙되게 하시고, 더욱 새롭게 하시고, 완성된 하나님나라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달려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거룩한 일(성화)도 인위적인 권모술수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시다. 그러므로 아무 염려하지 말고 기독교만의 위대한 복음, 곧 회복(구속)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도록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창1-2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진수를 풍성하게 맛보는 일을 잠시 보류하고, 이번에는 창조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정리하는 일들을 하기로 한다. 창1:1절 하반절(1b/학문적인 용어, 원문을 중심으로 구분함)부터 시작되는 창조의 사실은 “(그) 하늘과 (그) 땅을.....!”이다. 필자가 “(그) 하늘과 (그) 땅을”이라고 한 것은 우리 말 성경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문에는 정관사인 “그”(· ה)가 “하늘”과 “땅”에 모두 붙어 있다(접두어). 여기에서 잠간 히브리어 원전(BHS)과 우리말 성경을 비롯한 많은 번역 성경들의 섬세한 차이점에 대해서 잠간 언급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제기하는 문제인, 우리말 성경이나 다른 번역 성경들이 히브리어 원전에 기록된 여러 가지의 요소들을 정확하게,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정관사, 접속사, 감탄사, 성(gender), 수(number), 관용어, 더 나아가서는 다양한 장르의 명확한 구분, 그리고 히브리어의 섬세함 등의 좀 더 세밀한 요소들이 생략되거나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성경(다른 복음적인 번역 성경들)이 잘못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정말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언급한 “부족함”이란, 보다 더 섬세하고, 풍요롭고, 깊은 의미들을 맛보는데 아쉬움을 피력한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창1:1절 하반절이 “천지를”(하늘과 땅)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대로 읽게 된다면 무언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으며, 혼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이 “하늘과 땅”(창1:1b)이 v.8의 “하늘”과 v.10의 “땅”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창조의 “서론”이라든지, 또는 “제2의 창조”라는 등의 무익하고 위험한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창1:1절에서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 기독교의 위대한 유산을 하나님의 말씀, 처음부터, 첫 단어에서부터 그대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 원전에 “(그) 하늘과 (그) 땅”이라고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 땅에 국한된 것만이 천상계와 지상계의 모든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위대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물론 천상계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창1:2절에서 증거가 되겠지만, 천상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많이 알려주시지 않으셨으며, 더욱이 타락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제한적인 정보 외에는 허락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셋째 하늘”을 체험한 간증을 전하면서, “어떤 사람”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체험을 하였지만,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며, 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받지 않았다”(TNIV/고후12:4) 라고 하면서 그 큰 체험을 마무리하면서 “오직 약한 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서 천상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되는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된 삶을 풍성히 누리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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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아 놀자!
    2022-04-26
  • 지혜와 순수, 예수혁명가의 덕목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마태10,16-23) 오늘 새벽 FTA 관련 토론회를 시청하느라 잠을 설쳤습니다. 토론회가 끝나고도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토론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의도하지 않게 떠오르던 생각은 ‘예수의 정치성’ 문제였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 아래에서 수많은 강압정치와 그에 준한 제도들을 예수는 어떻게 파악하고 저항했을까? 성서를 액면 그대로만 보면 예수는 그런 이슈에 직접대응하거나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했는가? 피해갔는가? 그저 추상적인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대해 말씀하고 가르쳤는가? 아니면 실제 예수 모습과는 다르게 '막달라 마리아와 러브스토리'마냥 경전성립과정에서 제외된 또 다른 예수의 흔적으로 상상해야 하는가?’ 저의 신학과 신앙의 판단으로는 예수가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폭력적 방법이나 비판으로 직접 저항하지 않았지만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로마의 비인간화, 반 평화에 용감하게 반대했다고 믿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 대비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평화’가 아닌 ‘나의 평화’를 준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세상의 평화의 거부는 바로 로마의 평화, 즉 ‘팍스 로마나’의 거부이고, 그것은 당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인 것입니다. 물론 그 저항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저항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보나 보수라는 오늘의 정치적 성향 잣대로 예수혁명의 길을 가름하는 잘못된 평가입니다. 예수는 그런 기준보다 더 본원적인 차원에서 평화를 말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혁명은 모두 이런 방식이었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보고 그것의 변화를 위해 말하고 실천하심이 동시에 당시에 사회 정치 종교의 문제까지도 동시에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지평까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교적인 죄명을 뒤 짚어 쓰고 ‘정치적인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은 이런 예수혁명의 일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혁명을 꿈꾸는 예수혁명가들은 바로 이 혁명의 길을 따릅니다. 예수혁명가는 정치적 색깔이나 이데올로기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정치적 보수냐 혹은 진보라는 틀에 자유롭고 용감하게 근원혁명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기대어 표현하자면 예수혁명가들은 흔들림 없이 지혜로우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순박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현재 기독교 사회운동이 답보상태에 있는 이유도, 예수혁명은 뒷전에 있고 기꺼해야 사회개혁가들의 정치적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표현대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반(反)평화의 영과 폭력적 문화를 양산하는 기운, 그리고 이것을 위해 우리의 영을 침탈하는 악한 정서와 이데올로기, 즉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예수혁명이 맞닿는 운동의 지평이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처럼 정치적 선택과 결단을 수반할 수 없을지언정 그것에 매몰되지 않는 나, 우리, 이 세계의 참 혁명의 길입니다. 아직도 운동하는 이들의 수나 대모꾼들의 수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운동가들이 있습니다. 진보진양 조차 만약 ‘쪽수’나 데모규모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무의식 적으로도 착각한다면 엊그제 FTA 찬성론들이 돈으로 사람들을 동원한 FTA 찬성자들의 황당한 작태나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주의들조차 ‘지혜’와 ‘순수’를 회복해야할 때입니다. 순수가 우선입니다. 사회운동에서 운동이기주의 빠져 순수하지 못하면 이 세계를 보는 눈이 닫히게 될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하는 것이지요. 순수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뜻을 알 수 없고 그러면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순하면 지혜는 저절로 솟아 날 것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또 다른 지혜이지요. 말이 길었습니다. 오늘,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존재가 되라는 말씀을 더 절절하게 묵상하기 위해 어제 FTA 토론회 내내 답답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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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9
  •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창세기 3장 이후부터 그 “여인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이 오기까지를 “옛 언약” 시대(구약시대)로 명명하여 임시적이고 제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셨다. 즉 모형(모델, 그림자,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안식)를 맛보게 하셨다. 그 첫 번째 모형이 짐승의 죽음을 통해 얻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이었으며(창3:21), 바로 이어서 아벨의 어린 양을 “주목”해 보셨다(창4:4/사역: 봐이솨/ looked), 아벨의 어린 양은 창3:15절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의 가장 선명한 이미지이다. 즉 여인의 후손은 어린 양과 같이 희생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셔서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실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3장 이후부터 여인의 후손의 실체가 오시기 전까지는 본래의 세계가 아닌,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모형의 세계라는 점을 확신하여 이 부분의 말씀을 이중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모형의 세계와 실체의 세계로 매끄럽게 연결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형의 세계를 실체로 해석하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드디어 “때가 차매”(갈4:4) “여인의 후손”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탄의 요구인 우리의 죄 값을 치러주시고 “자기 백성”인 우리를 영원한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나라(Already/Not Yet)에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곧 창조의 회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된 하나님나라는 죄악으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죄의 습성이 남아서 여전히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의 교회는 깨어 경성하여 이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싸움(영적전투)을 벌이면서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대망해야 한다. 이러한 전개가 바로, 개혁주의적,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며, 필자의 성경해석이다. 아무쪼록 간곡한 부탁을 드리고자 한다. 이제부터 “구약아 놀자!”라는 코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놓고 읽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물론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전제, 또는 선입견이 있어서, 때로는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아주 좋지 못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독자들의 선입견을 다 버리라는 말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우선은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경을 그대로 읽기를 바란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문자적 읽기”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성경을 많이 읽으면(무조건적 통독), 다 된다.”라는 식으로 오판을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히는 바는 성경, 아니 어떤 글이든지 간에 문자만 보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큰 문제를 낳게 된다. 학교에서 글 읽기를 다시 배워야 한다. 혹신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손을 뻗치느냐하면, 신학의 무용론을 주장하게 되거나, 자기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허하게 엎드릴 줄 아는 자세부터 견지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경을 많이 통독하고, 많은 참고서를 읽고(수없이 많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함), 많이 배우고, 묵상하고, 실행하기를 결단하기를 바란다. 특히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명을 맡은 우리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여, “이제 말씀으로는 안 된다.”가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해도 “언제나 말씀으로 된다.”라는 고집을 부리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를 감히 부탁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야말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하고, 위대하시고, 맛과 멋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사실을 마음껏 감상하기를 바란다. “별들을 불러내어 하늘에 걸어놓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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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아 놀자!
    20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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